[아이뉴스24 전다윗 기자] "그동안
[아이뉴스24 전다윗 기자] "그동안 4·3 사건은 잊혀진 역사였다. 많은 도민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비극이지만, 이를 기억하는 이들은 '빨갱이'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 입에 담기조차 어려워했다." 제주 4·3 평화공원에 남겨진 희생자들의 얼굴 사진. [사진=전다윗 기자] 전영미 제주역사문화해설연구회 대표는 지난 17일부터 19일까지 진행된 '한국기자협회 제주4·3 팸투어'에서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기점으로 4·3이 잊어선 안 될 역사로 기억됐으면 한다"며 이같이 설명했다.이 기간 제주 4·3 사건 기록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봉헌식이 열렸다. 앞서 지난 4월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제주 4·3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승인했다. 제주4·3기록물은 진실 규명과 화해의 과정을 담은 1만4673건의 역사적 기록을 담고 있다.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와 옥중 엽서(27건), 희생자와 유족들의 생생한 증언(1만4601건), 시민사회의 진상규명 운동 기록(42건), 정부의 공식 진상조사보고서(3건) 등이 포함됐다.제주 4·3사건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기억 중 하나로 꼽힌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4·3 사건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이 기간 공식 확인된 희생자만 1만4935명에 달한다. 실제로는 당시 도민의 10분의 1 수준인 2만5000명에서 3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희생자의 33%는 노인, 어린이, 여성이었다. '곤을동', '어우눌', '리생이' 등 순우리말 이름의 마을공동체 109곳도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제주 4·3 성산읍지역 양민 집단학살터 표지석. [사진=전다윗 기자] 「 특검 150일-윤석열과 조은석③ 」몸은 들썩거렸고, 입술은 달싹거렸다. 자세를 곧추세우고 등받이에 등을 대는 여느 배석자의 몸가짐이 아니었다. 조금의 빈틈만 보여도 치고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마다 제지당했고, 꾸지람을 들었다. 그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한 끝에 드디어 발언권을 얻은 건 국정감사가 절반이 흐른 이후였다. 그는 우회하지 않았다. 곧바로 찔러 들어갔다. " 개원 역사상 75년 만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75년 만에 조은석 위원 같은 분이 처음 들어와서 그렇습니다. "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이 감사원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그는 국감장에서 공손하지 못한 태도로 인해 의원들의 집중적인 비판 대상이었다. 중앙포토 그,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현 감사원 감사위원)의 타깃은 같은 직장에 감사위원(차관급)으로 재직하던 조은석(현 내란 특검)이었다(이하 경칭 생략). 유병호의 입은 매서웠다. 그리고 때로는 공개 석상에서 한 발언이라 생각지 못할 정도로 거칠었다. ━ 조은석 vs ‘윤석열의 감사원’, 일합을 겨루다 유병호가 열변을 토하던 2023년 10월 그와 조은석은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니 조은석의 적이 유병호 한 명뿐이었던 건 아니다. 그는 사실상 감사원 조직 전체와 싸우고 있었다. 감사원 감사위원 시절의 조은석 특검이 2023년 10월 국정감사장에서 전현희 전 국민권익위원장 감사보고서 패싱 논란과 관련해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국회 영상회의록시스템 캡처 조은석의 내부 고발로 감사원은 공수처에 압수수색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수사를 받고 있었고, 조은석 역시 감사원의 ‘수사 요청’으로 검찰 수사를 받는 처지였다. 내전의 발단은 앞서 2회에서 잠시 언급했던 전현희 전 국민권익위원장(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다. 당시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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